친구의 어머니 - 상편

고등학교 삼 학년 때, 학교 부근에 있는 같은 반 친구의 집에서 학교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나랑 그렇게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애의 성격이 남자답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친구라 시골에서 새벽에 열차를 타고 힘들게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내가 보기에 안됐던지 자기 집에서 같이 숙식을 하며 학교에 다니자고 권유를 하길래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몇 번 사양을 했으나 자꾸 그런 이야길 하길래 하루는 토요일 날
일찍 학교를 파하고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그 친구의 집이 학교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고급 주택가에 있었는데,
단층의 한옥으로 마당도 넓은데다 마당 한쪽엔 화단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집도 커서
시골에서 어렵게 살던 나에게는 별천지에 온 듯 싶었다.

그 친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서 친구가 이끄는 대로 거실로 들어오니 어머니인듯한
아주머니께서 방에서 나오시며 반갑게 맞이 하신다.
“어서들 와! 이 친구가 네가 이야기하던 그 친구니?”
동식이가 대답을 한다. (친구의 이름이 동식이다.)
“예. J읍에서 열차통학하는 친구예요. 정수야, 인사해. 어머님이셔.”
“저.. 안녕하세요. 김 정수라고 합니다.”
“그래. 남자애치고는 참 곱상하게 생겼구나. 배 고프지? 어서 씻고 와. 밥 차려 줄께.”
친구의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두고 윗도리를 벗고 나와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가서
씻는다.

참.. 곱고 우아하게 생기신 분이다.
나이가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고, 얼굴은 둥그스럼하게 생긴데다 화장을 해서 그런지
주름살은 별로 보이지 않고 내 눈에는 좀 화려하게 보이는 홈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부유층의 안방마님같이 보인다고나 할까?
특히, 눈매가 참 선하게 보이고 정감이 가는 분이다.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나서 다시 거실로 들어오니 어느 새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다.
“자. 이리 와서 식사들 해.”
“이야. 맛있겠는데.. 정수야 밥 먹자.”
“잘 먹겠습니다.”
친구와 둘이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고, 친구의 어머니께선 그런 우리를 인자한 미소를
띠운 채 바라보고 계신다.
정말 우리 집과는 밥상이 틀리다.
하얀 쌀밥만해도 그렇고, 소고기 장조림이라든지 계란 후라이나 구운 김등..
지금이야 누구나 그렇게 먹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생각도 못하던 반찬들이다.
배도 고픈데다 밥이나 반찬들이 너무 맛있다 보니 염치불구하고 금새 밥 한 공기를 비운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물어 보지도 않고 부엌으로 가서 다시 밥 한 공기를 가져와서 내 앞에
놓으신다.
순간 좀 창피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밥 한 공기를 더 비운다.
이젠 배가 불러 더 먹을래도 먹을 수가 없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물어본다.
“더 먹을래?”
“아니요. 배 불러서 더 못 먹겠습니다.”
“그래?”
그리고는 밥상을 내가신다.

잠시 후, 쟁반에다 과일을 깎아서 내오더니 우리 앞에 앉아서 포크로 과일을 하나 찍어
내게 준다.
“정수라고 했지? 한번 먹어 봐.”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식사 후 후식으로 과일을 먹는 것은 처음인가 보다.
사과, 배등을 깎아서 내온 것 같은데 입에서 살살 녹는다.
친구랑 친구 어머니하고 나 이렇게 셋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는다.
친구 어머니가 날보고 말을 한다.
“정수 너. 공부 잘 한다며?”
“아니에요..”
옆에서 친구가 거든다.
“반에서 일 이등을 놓치지 않는 애야.”
“참.. 대견하구나. 시골에서 새벽밥을 먹으면서 어렵게 학교에 다니며 공부도 잘한다니..
우리 애가 너만큼만 하면 얼마나 좋겠니?”
친구가 볼멘 소리를 한다.
“엄마는 참.. 내가 뭐 어때서?”
그때만 해도 성격이 내성적이라 남 앞에 잘 나서지 못하고 수줍음을 많이 탈 때라
뭐라고 말도 못하고 얼굴이 붉어진 채 그냥 우물거리고만 있다.
친구의 어머니가 말을 이어간다.
“동식이 말이 너랑 같이 있으면서 같이 공부도 하고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내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잠이야 동식이 방에서 같이 자면 될 것이고, 밥은 숟갈만 하나 더 놓으면 되니
부담을 갖지 말고 지내도록 하려무나.
그냥 내 집처럼 생각하고 나를 어머니로 생각해주면 더욱 좋겠고..
동식이 아래도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으니 친동생처럼 대하면서 공부도 좀 가르쳐 주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쉽게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 볼게요.”
“그렇게 해야겠지.. 나는 좀 나갔다 올 테니까 둘이 천천히 놀다 가.”
친구의 어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외출준비를 하고 나온다.
성장을 한 모습이 눈이 부실 지경이다.
저런 엄마를 둔 동식이는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인사를 한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래. 부모님께 잘 말씀 드리고 가급적이면 같이 지냈으면 좋겠구나.”
“잘 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나가시고, 옆에서 동식이가 말한다.
“내 방으로 가자.”
동식이를 따라 동식이 방으로 들어간다.
제법 넓은 방인데, 한쪽에는 침대가 놓여져 있고 내 눈에는 아주 고급으로 보이는 책상과
책상 옆에는 작은 전축이 놓여져 있었다.
우리 집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시골에 있는 방 두칸 짜리 허름한 집에 안방은 부모님이 쓰시고 작은 방은 두 살 위의 형과
같이 쓰는 데, 책상이라고는 형 혼자 쓰는 앉은뱅이 책상 하나뿐이고 나는 밥상을 펴서
공부를 한다.

“음악 들을래?”
“으응..”
동식이가 전축에 레코드 판을 넣는다.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팝송이 흘러 나온다.
‘Proud Merry, Let it be, Heart of gold…
동식이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춤을 추는 모습이 참 자연스럽고 보기가 좋다.
“정수야. 뭐해? 춤 안 추고..”
“으응.. 난 춤 출줄 몰라.”
“그냥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면 돼..”
동식이가 춤을 추면서 내 손을 잡아 끈다.
엉겁결에 의자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해봐.”
동식이가 내 앞에서 슬로우 동작으로 춤을 추는 자세를 가르쳐 준다.
하는 수 없이 동식이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지만, 어색해 죽을 지경이다.
“야! 청춘예찬도 몰라? 청춘을 즐겨야지. 젊은 놈이 맨날 공부만 파고 언제 인생을 즐겨?
자, 이렇게.. 으~싸 으~싸…”

그 때 방문이 빼꼼 열린다.
꼬마애 하나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본다.
“으이그.. 또, 난리야.”
동식이가 춤을 추면서 말을 한다.
“동재 왔니?”
“멀쩡한 사람 하나 또 버리네.. 쯔 쯔..”
“뭐야?”
동식이가 춤을 추다 말고 쫓아가는 시늉을 하자 꼬마애가 얼른 문을 닫는다.
“하나 밖에 없는 내 동생이야.”
“나이가 많이 어리게 보이는데?”
“국민학교 오학년이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귀엽고 좋겠네?”
“뭐? 귀여워? 아~휴.. 저 놈 얼마나 영악한데?”
다시 문이 빼꼼 열리며 꼬마애가 낼름 혀를 내밀며 말을 한다.
“내가 뭐가 영악해? 형아가 못됐지..”
“저 놈이 또?”
다시 문이 꽈당 닫힌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새 네 시가 다 되어간다.
“열차시간에 맞추려면 이제 가봐야겠다.”
“그래? 그럼.. 잘 가. 부모님께 말씀 잘 드려서 웬만하면 같이 있도록 하고..”
“알았어..”
같이 방을 나온다.
“동재야! 인사해. 형님 친구다. 앞으로 형님이랑 같이 지낼 거야.”
“안녕! 나 민 동재야.”
“저 놈 말하는 것 좀 봐. 형님 친구보고 반말을 하네?”
“뭐.. 열살 차이도 안 나는데.”
“뭐야?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는 모양이 너무 귀엽다.
“그래.. 나 김 정수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정수 형아. 우리 형아 조심해. 완전히 날나리야.”
“저 놈 저거 말하는 것 좀 봐.”
동식이가 쫓아가서 동생을 잡고 꿀밤을 먹인다.
동생이 달라 들고 둘이 한바탕 씨름을 한다.

참.. 보기가 좋다.
우리 집과는 딴판이다.
엄하시고 말이 별로 없으신 아버님, 잔정이 없는 여장부 같은 어머니(계모),
나에겐 두목(?) 같은 형님…
친구의 아버님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친구의 어머님이나 형제간에 흐르는 따뜻함이
샘이 날 정도다.
그리고, 부유함이라고 해야 하나? 넉넉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가 사는 환경과 다른 별천지에서 놀다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친구의 집을
나온다.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면서 친구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 오른다.
저녁식사를 하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린다.
이제 삼 학년이라 열차통학을 하면서 공부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아
학교 부근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아버님께서는 아무리 친구지간이라도 친구의 집에 폐를 끼치면 되겠느냐고 걱정을 하시더니
고 삼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인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신다.
대신 그냥 공짜로는 있을 수 없으니 다달이 쌀이라도 보내주시겠다고….

다음날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동식이가 내게로 와서 묻는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어?”
“응..”
“뭐라고 그러셔?”
“일단 허락은 받았어..”
“야! 잘됐네. 그럼 내일 모레가 일요일이니 그때 네 짐들을 우리 집으로 옮기면 되겠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지. 책하고 속옷들 정도니..”
“아무튼 잘됐다.”

그리고, 일요일 날 아침 열 시경에 짐 보따리와 책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친구의 집에 들어서니 오후 한시가 다 되어간다.
친구의 어머니께선 마당에 있는 화단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계시다가 반갑게 맞이 한다.
“어서 와. 짐 들고 오느라 힘들었겠다.”
“안녕하셨어요.”
동식이가 자기 방에서 쫓아 나오더니 내 손에서 짐 보따리를 빼앗아 들고 들어간다.
동식이를 따라 동식이 방으로 들어서다 깜짝 놀란다.
아니, 이럴 수가..
동식이 책상 옆에 똑 같은 책상이 하나 더 놓여져 있다.
동식이가 쓰던 옷장 옆에 새로 갖다 놓은 옷장이 보이고 침대도 바꿨는지 둘이서 자도
남을 만큼 크다.
동식이가 새로 갖다 놓은 옷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게 너 옷장이야. 여기다가 네 옷가지들을 걸어 놔.”
”……………….”
도대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까지 해 놓다니..
집에서는 벽에 박아 놓은 못에다가 옷을 거는데 내 옷장이라니…
“뭐해? 빨리 정리하지 않고..”
“아..알았어.”
옷가지들이라 해봐야 집에서 입을 간단한 스웨터와 바지 두어 개에다 잠바 하나.. 그리고,
갈아 입을 속옷들이 전부인데..
아담한 옷장인데도 삼분의 일이 차지 않는다.
옷가지들을 대충 넣어두고 책들을 책꽂이에 정리한다.
“정수야. 다 됐으면 나가서 밥 먹자.”

동식이와 마루로 나오니 마루에 큰상을 펴놓고 국수를 준비해 놓았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배 고프지? 어서 앉아서 먹어.”
“잘 먹겠습니다.”
다싯물에 뭐가 들어갔는지 국수가 참 맛있다.
동식이와 국수 두 그릇씩을 비운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그런 우리를 쳐다 보더니
“맛있니?”
“예. 아주 맛있어요.”
“앞으로 둘이서 사이 좋게 형제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다.
동식이 쟤는 공부보다 다른 데에 더 관심이 많아서 걱정을 했는데, 자기도 그걸 아는지
너하고 같이 있으면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괜히 내가 멋적어 진다.
“동식이도 공부를 열심히 해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
내가 동식이에게 묻는다.
“근데, 오늘 일요일인데 아버님께선 보이시질 않네?”
“으응.. 지금 외항선을 타셔. 선장이시거든..”
순간 동식이 어머님의 얼굴이 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랬구나..”

그렇게 친구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학교에 다닌다.
동식이의 성격이 남자답고 활달하다 보니, 아무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고
같은 나이 또래의 여학생들에게 관심도 많고 또, 여학생들이 잘 따르다 보니 아무래도
공부에 소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자기도 이젠 고 삼이니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잡고 하려다 보니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힘들 것이고, 아마.. 그래서 나랑 같이 있겠다고 한 모양이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재소리를 듣는 나였으니, 나랑 같이 지내다 보면
자신도 더욱 분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어쨌든 결과는 좋았다.
반에서 중하위였던 동식이의 성적이 나랑 같이 지내면서 중상위권으로 올라갔으니..
성적표가 집으로 오는 날, 한바탕 파티가 벌어졌다.
동식이의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고맙다며 한번씩 옷도 사주시고 용돈도 주신다.
몇 번을 사양하지만, 자기는 내 어머니와 똑 같은 사람인데 자꾸 사양하면
나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면서 섭섭해 하시면 마지 못한 척 받는다.
오히려 친구의 집에서 잘 먹고 잘 지내는 내가 고마워해야 마땅한데..
정말 하루하루가 꿈 같은 나날이었다.
먹는 거나.. 입는 거나.. 생활하는 게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동화 속에 나오는 신데렐라처럼..
그리고, 내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인 ‘헷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같은 친구의 어머니와 한집에서 내 친어머니처럼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행복했다.
시골 집에 계시는 내 어머니보다 더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신다.
한번씩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을 때는 내 가슴이 다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럴 땐 그런 어머니를 둔 친구녀석이 너무 부러웠다.
한번씩 내 곁을 스칠 때 친구 어머님의 몸에서 나는 향수냄새 같은 걸 맡을 땐
한참 동안 그 향기에 취해 꼼짝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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